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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06-18 13:36
6/17 경복궁 산책
 글쓴이 : 운산 조회 : 6,560  

법회와 공양을 마치고 경복궁에 다녀왔습니다. 고니시 다카코씨를 만날 수 있을까 했지만 일요일이라 오시지 않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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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아줌마의 우리 궁궐 사랑


면접관들의 표정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순간 내 마음에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01년 겨울, 나는 준엄한 역사의 심판대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시 겨레문화답사연합(현재‘한국의재발견’)이라는시민단체에서 궁궐지킴이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다.

신청서를 들고 찾아간 나를 처음엔 무척 반가워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을 찾아올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궁궐을 안내해 줄 외국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터였다. 15년간 한국에서 살아온 일본인 주부라면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을 가진 지원자라고, 나 스스로도 자신 있게 생각했다. 그런데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치는 동안 예상치 못했던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내 이름은 고니시 다카코, 나는 한국 궁궐의 역사상 가장 참담한 수난을 가져다 준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오전 10시 20분, 일본인 관광객(역사 교사)에게 경복궁을 안내하는 고니시 다카코


나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입니다 )

1592년 임진왜란 당시1만8천여 명의 왜군을 이끌고 맨 먼저 조선땅을 침략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만에 이미 선조가 도망간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까지 진군해 올라갔다.

그의 지휘 아래 당시 경복궁과 창덕궁 등 한양의 주요 건물이 불에타 잿더미로 변했다. 그와의 연관성을 묻는 면접위원의 질문에 나는이렇게대답했다.

“직계는 아니지만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이라고 알고 자랐습니다. 대대로 무사의 집안이었고 가보로 내려오는 칼도 있습니다.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혈족들이 멸족의 위기에 처했을 때 가까스로 화를 피해 살았던 곳이 유명한 도쿠시마라는 지방인데요, 저희 조상들도 그 곳에서 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역사로 인해 고니시라는 성 조차도 일본에서는 희귀성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내가 실망할까봐 면접관들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이름은 한국의 역사에서 결코 그냥 들어넘길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당황했다. 일본인이란‘짐’을 지고 한국에서 살아오는 것만으로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에 나이 마흔이 되도록 전혀 의식하지못하고 살아 온 400여년 전 가계의 역사가 또 한번‘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나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다.

당시 나는 1남 1녀의 자녀와 휴대폰 판매업을 하는 남편을 둔 평범한 성남댁 아줌마였다. 남편과는 서울올림픽이 있던 해 만나서 그 이듬해, 멀리 강원도 횡성에서 몰려온 시댁 어른들을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일본청년과 결혼한 시누이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선후배 사이였다. 맏딸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시던 친정아버지를, 시누이가 끈질기게 설득했다. 당시 나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남편 역시 일본말을 할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누이로부터 소개를 받은 후,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우리는 조금씩 언어의 장벽을 넘어 가까워졌고, 일본인 여자가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나는 겁도없이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 온 것은 첫 아이 준호가 태어난 뒤였다. 그때까지는 친정식구들과 오랜 직장 선배인 시누이 부부 그리고 말이 없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남편에 둘러싸여 나는 마냥 행복한 일본인 아내로 살았다. 어린 아들을 안고 한국에 와서도 낯설지가 않았다. 주변엔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정작 나는 일본인이라는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들 준호와 딸 희수를 키우는 한편 틈틈이 지역 문화센터에서 주민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며 그럭저럭 10년이 넘도록 평범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에서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아들 준호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어린 아들이 학교에 가다 말고 울면서 돌아온 것이다. 까닭을 알아보니 등굣길에 만난 친구들이“너희 엄마, 일본사람이지? 우리나라 사람들을 죽인 나쁜 일본사람 맞지?”하면서 놀려 댔던 것이다. 아이가 상처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난 일본사람이었다. 나 자신은 한국인의 아내니까 한국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한국사람들에겐 일본사람은 특별한 외국사람이었다.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아이는 물론, 나 자신조차 납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그때부터 한국에 대해서 알아야겠다는생각을 했다. 그러나 주부로, 일본어 선생으로 살아가는 일상만으로도 바빠서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월드컵을 앞둔 2001년 말, 일본어를 배우던 주부들이 궁궐 지킴이를 함께 해 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건네 왔다. 생생한 역사의 현장인 궁궐과 가까워지는 일이야말로 오래도록 기다렸던 진정한 역사 공부의 기회였다. 그래서 당장 신청을 했다. 그런데 막상 함께 공부하자고 했던 제자들은 60여 시간의 교육 후에 또 6개월 동안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겁을 먹고 도중에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손님이나 나그네처럼 살고 싶지 않았고,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서울까지와서 신청서를 낸 것인데,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결정을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결국 주최측은 나를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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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클릭하시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1. 나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입니다

2. 궁궐을 파괴한 적장의 후손에서 궁궐지킴이로

3. 궁궐에서 만난 한국인의 초상

4. 나는 자랑스러운 궁궐지킴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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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jpg

고니시 다카코


63년생 일본인 주부.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15년째 한국에 살고 있다. 고등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하다.
2002년에 처음 궁궐 지킴이 활동을 시작하여 주로 일본에서 오는 관광객들에게 우리 궁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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